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손상률 담임목사 2010.01.16 14: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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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사슴

 

 

나는 이따금 조용한 시간 혼자서 기도할 때면 영혼의 목마름을 호소하는 오성주의 가스펠송 <은혜의 강가로>를 부르곤 한다.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주의 강 가로/ 갈한 나의 영혼을/ 생수로 가득 채우소서/ 피곤한 내 영혼 위해 .......”
 

홍수가 났을 때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먹을거리, 즐길 거리가 있고 수준 높은 문화의 이기를 누릴 수 있는데도 그런 것들이 정신적인 욕구까지 채워 주지는 못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 주변에도 감성적인 예배 프로그램과 매스컴에서 쏟아지는 말씀의 잔치들이 있지만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의 영적 수준이나 기대치가 엄청 높아졌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예배의 문화와 환경이 아무리 향상되었다 하더라도 영혼의 갈급함과 사모하는 마음이 더 고조되어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일 현상이라고 여길 것이라 생각된다.

 

   옛날 고라 자손의 시인들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하고 애절하게 부르짖었다(시 42:1). 이들은 왜 영혼의 갈증을 시냇물을 찾는 사슴에 비유했을까? 노천명 시인은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고 하며 사슴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고 묘사했다. 사실 사슴은 뿔만 크고 웅장해 보였지 사나운 짐승은 아니다. 오히려 초식동물을 대표하는 순하고 약한 짐승이라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술람미는 이상적인 남자 솔로몬을 연모하면서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고 했다(아 2:7). 이 문장을 놓고 스태르크(Staerk)나 할러(Haller)같은 사람은 사슴을 사랑의 여신 아스타르테(Astarte)의 성스러운 짐승(聖獸)에 해당한다고 했지만 그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사랑의 심벌(Symbol)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은 그에게 바짝 다가가려고 몸부림을 친다. ‘내 주의 은혜 강 가로!’ 그 은혜의 맛에 도취되고 그 풍성함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은 갈증을 가지게 된다. 그 어디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영혼의 목마름이 해갈되어 지면 비로소 하박국처럼 “나의 발을 사슴 발 같게 하사 나의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하고 새 힘이 솟아나는 간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http://www.yer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