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손상률 담임목사 2009.09.13 02:14:24
1983

손자에게 꼼짝 못하는 이유

 

 

 옛날부터 자식 자랑을 늘어놓으면 반쯤 맛이 간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렇지만 자랑이 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사람은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하지 않고 계속 늘어놓기만 한다. 억지로 들어 줄 테니 5천원이나 만원을 내 놓으라 해도 마다하지 않는, 이해 못 할 습성이 바로 노인현상의 초기증상인 것 같다.

 

내가 부산에 있을 때 그 교회 어떤 장로님은 주일 오후시간 당회원들이 모이는 자리에 꼭 손자를 데리고 왔다. 여럿이 대화할 때도 옆자리에 앉혀놓고 과일이나 과자를 먹이곤 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하니까 짐짓 "어 그놈 사내답게 잘 생겼다"하고 칭찬을 해 주면 이 할아버지는 그걸 진담으로 알아듣고 좋아하면서 "이놈이 진짜 장군이라요! 나하고 팔씨름을 하면 내가 한 번도 못 이겼다니까!"하고 맞장구를 친다. 그때 나는 속으로 '참 주책바가지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손주를 보면 체통머리도 없어지는 것일까?'하고 의아해 했다.

 

우리 주변에도 나를 비롯해서 손주에게 얽매이거나 꼼짝 못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있다. 다들 말로는 "오면 좋고, 가면 더 좋고!" 그러면서도 안 보면 또 보고 싶고, 주어도 주어도 더 주고 싶은 이상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다.

 

언젠가 같은 연배의 친구들이 모여서 제각기 손주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두 다 서로 흉볼 처지가 못 되니까 약간씩 부풀러 가면서 자랑을 하는데 거기서도 나의 자랑거리가 단연 장원감이었다. 좀 쑥스럽지만 그때 내가 출품한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지난 여름 캐나다에 갔을 때 손주들 중 제일 막내로 지독하게 말 안 듣는 개구쟁이 휘규 이야기다. 어느 날 오후, 내가 거실의 소파에 누워 잠이 들려고 하는데 이 녀석이 쫓아와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암말 않고 입고 있던 손바닥만한 조끼를 벗어 나의 배 위에 덮어 주고 그냥 가버렸다. 나중에 그 말을 했더니 모두들 한마디씩 감동적이라고 표현했다. 며칠 뒤에 장거리를 자동차로 여행을 하는데 바로 나의 뒷자리에 앉아 나의 반질반질한 머리통을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제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 그걸 나의 민둥숭이 머리에다 붙인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비록 짓궂은 장난기가 섞인 행동이지만 나에게는 깊은 인상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이 손주자랑 레퍼토리 때문에 독자들에게 주책스러운 할아버지로 낙인찍히고, 또 벌금도 내어야 될 각오하면서 왜 이렇게 늘어놓아야 되는지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를 일이다.

 

 

출처 : http://www.hu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