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멀린 2009.07.23 11: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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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은 현자(賢者)

 

 

   나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이따금씩 생각나게 하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아마 나이 열대여섯 살 되었을 적 일인 것 같다. 우리 집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마을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동네 어른 한 사람과 같이 오게 되었다. 그분은 쌀자루를 지개에 지고 오는데 내가 그것을 대신 져다 준 것이다. 내가 짐을 지고 오는 동안 그분은 나에게 칭찬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자기 아들과 비교해 가며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예절 바르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어른 같다고도 했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답게 동네에서 가장 모범적인 아이라는 말로 나를 들뜨게 해 주었다. 결국 나는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을입구까지 그대로 져다 주게 된 것이다. ‘반 짐에 골병든다’는 말처럼 어깨가 굳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은 고통이 있었지만 “네 덕분에 편하게 오게 되어 고맙다”고 하는 그 한마디에 마음은 참으로 기뻤다. 그런데 다음날 그 집 아들이 “어제 네가 우리 아버지 짐을 지고 왔다며, 아버지가 그러는데 오면서 계속 추켜 주니까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계속 지고 오더라고 하데.” 그 소리를 듣고 나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나는 어깨가 아프고 힘이 들었지만 그분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으로 큰 보람을 느꼈는데, 그분은 자기의 장단에 놀아나는 광대로 여겼을 것이니 좋은 일하고도 참으로 기분 나쁜 체험이 되었다.

 

   살아가면서 오래도록 이 일이 기억나는 것은 겉으로는 추켜세우면서 속으로 가지고 노는 것 같은 사람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그렇다 치고 거기에 놀아나듯 바보처럼 아직도 그때의 현장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에 참으로 씁쓸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한편 겉으로 하는 말이라도 참말인 줄 알고 곧이들을 때는 순간적인 즐거움이라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 같은 경험의 반복으로 내공이 쌓이다 보니 아닌 줄 알면서도 놀아주는 척 하는 위선자의 가면을 쓰는 것 같아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 중에는 영악한 바보가 있고, 바보 같은 현자가 있다고 한다. 현란한 말로 다른 사람을 추켜올려 놓고 실상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전자에 속한다. 속고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 당해주는 사람은 후자일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 ‘바보’ 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고 한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자기 실속 챙길 줄 모르고, 영악한 사람들 속에서 아둔하고 당하기만 하며 살았다는 뜻이었는지 모른다. 사정이야 어떻든 자기를 비우고, 끝없이 베풀며 이용당해 주는 삶을 즐기며 사는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세상이 필요로 하는 바보일 것이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우리 주변에 간혹 그런 바보들이 섞여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살아갈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출처 : http://www.hu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