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자존심(7.5)
고종(高宗)의 아버지 흥선(興善) 대원군에 대하여 많은 일화가 있다. 10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쇄신하며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등 개혁자의 면모를 보여준 반면, 지나친 쇄국정책과 천주교를 박해하여 무고한 피를 흘린 일이며, 또 며느리인 명성황후와의 반목으로 국가적 불행을 불러오게도 했다. 대원군에게는 남다른 배포와 웅지, 그리고 대단한 자존심이 숨겨져 있었다. 조선후기 김좌근(金佐根)을 영수로 안동 김씨의 육십년 세도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천하장안이라 불리는 건달들을 데리고 시장 바닥을 떠돌며 거렁뱅이 행세를 하였다. 속으로 불타는 야망은 숨겨놓고 겉으로 ‘상가집 개’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온갖 수모를 감내하면서 비굴한 왕족의 생활을 계속했다. 드디어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와 손을 잡고 그의 둘째 아들 재민을 왕위에 등극시킨 다음 자신은 국태공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유생들의 연좌농성하는 꼴을 보지 못하고, 서원을 철폐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려했고, 백성의 원성을 들으면서도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실의 위상을 세우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는 과거의 권력자들처럼 당장 정적을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식의 보복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숙적인 안동김씨 문중을 무력하게 해 놓고 조정에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안동김씨 가문의 세도가로 첫 번째 숙청 대상인 김병기(金炳冀)를 경기도 광주(廣州)유수로 제수하였다. 한때 중앙정부의 훈련대장과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그에게는 엄청난 수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김병기는 모든 굴욕을 감내하면서 관직을 수행하였다. 훗날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빌미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게 되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강 포구까지 밀고 들어오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조정은 이 엄청난 국난의 위기와 민심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대원군은 낙향 중에 있는 김병기를 불러 독대하면서 “내가 그동안 국정의 경험이 없어 시행착오를 빚었다. 만약 대감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사태를 어떻게 풀 것인가?”하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진다. 김병기 역시 개인적인 원한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국난을 해결하는데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두 사람 다 대단한 자존심을 지키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출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진정한 자존심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과감하게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만이 지킬 수 있는 비장의 무기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출처 : http://www.hu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