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예람지기 2007.07.22 15:11:54
2009

공동 운명체

 

     삼라만상이 공존하는 자연계에서 외모나 성격이 전혀 다른 객체가 서로 어울리며 조화롭게 상부상조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이런 경우 서로가 상대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하고 자기의 부족분을 그쪽에서 채우며 상생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나 문화를 되돌아 볼 때 크고 작은 모든 공동체가 다 이런 원리에서 유지되며 발전을 거듭해 나왔다는 것을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최근 어느 잡지에서 <바위와 나무>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참으로 효과적인 자연의 공생관계를 묘사 한 것이어서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해변의 절벽과 바위들은 오랜 풍화 작용을 견디다 못해 쩍쩍 갈라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바위 틈새에서 파란 싹이 돋아났다.

 바위 : 넓고 넓은 세상을 놔두고 왜 하필 내게로 온 거니? 

새싹 : 나도 몰라! 바람이 왜 하필 날 여기로 데리고 왔는지,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해. 세월이 흘러 새싹은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비록 바위틈이 좁고 거칠기는 해도 바위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바위는 나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사랑하는 나무에게 줄 것이 너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바위 : 나를 안 만났으면 너는 정말 멋있는 나무가 되었을 텐데. 

나무 : 그런 말 하지마! 나에게는 네 품이 제일 좋아!

사실 내색은 안했지만 나무는 고통스러웠다. 바위가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 가끔 쏟아지는 소나기, 바람에 밀려오는 부서진 파도 파편이 전부였다. 나무가 수분을 흡수하기 위해 뿌리를 뻗으면 뻗을수록 바위에는 균열이 심해지고 으스러졌다. 나무와 바위는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봄날, 바위는 운명의 날이 왔음을 알았다. 나무가 뿌리를 박고 있던 큰 가슴 한 쪽이 갈라져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바위의 가슴은 나무 때문에 쪼개지게 된 것이다. 나무에게 조금이나마 더 주려고, 나무가 뿌리를  더 깊게 내려 무엇이라도 좀 더 많이 찾게 하려고 가슴을 자꾸자꾸 넓게 연 것이 너무 지나쳐 버렸기 때문이다.

바위 : 이제 너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아. 너를 만난 뒤에서야 기쁨이 뭔지 알았어.

나무 : 나도 다른 나무처럼 멋있고 우람하게 클 수는 없었지만 그런 것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너와 함께 한 세월은 나에게 참으로 행복한 날들이었으니까.

그날 밤 푹풍우가 몰아쳤다. 이윽고 바위는 절벽에서 뚝 떨어져 아래 바다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나무는 바위를 꼭 끌어안고 운명을 같이했다.

피할 수 없는 숙명 이었다고나 할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실 때 이미 공동운명체는 시작되었다. 기본단위인 부부의 관계에서 부터 가족 공동체, 사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로 발전 하게 되지만 어느 경우이든지 자기만의 욕심을 위해서 선택 할 수도 없고 행동 할 수도 없는 공동운명체가 되고 만 것이다. 어차피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면 네 탓 내 탓을 하기보다 그 속에서 정을 들이고 그와 함께 보람을 찾으며 즐거움을 이끌어 내는 것이 지혜롭고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진다.


출처 : http://www.hu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