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예람지기 2007.07.01 1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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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약이라지만

 

               ‘세월이 약(藥)이다’ 는 말이 있다. 지금은 감당하기 힘들더라도 참고 견디다 보면 세월은 흐르게 되고, 그러다 보면 기억에서 점차 잊혀져 간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일반적인 통념도 약발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요즈음도 현충일 같은때 국립묘지를 찾아가는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6.25 때 전사한 남편, 또는 월남 전쟁에서 잃은 자식의 묘비 앞에 앉아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들은 오랜 세월, 강산이 몇 번씩이나 변해도 전혀 삭아지지 않는 상처를 가슴에 묻어놓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나에게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이 있다. 어쩌면 나의 목회 인생에 있어서는 가장 큰 상처요 아픈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창원에 있는 성주교회(지금은 서머나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것은 1975년,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을 3개월 앞둔 11월이었다. 설립된 지 25년 된 그 교회는 교인이 30여명에 장로 1명과 집사 9명 정도 되는 전형적인 농촌교회였다. 77년 4월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된 나는 마음속에 창원 새 도시의 미래를 그리면서 나름대로 야심차게 목회사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시기 시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49인승 대형버스를 구입하고 교통이 불편한 여러 지역을 누비며 교회의 영역을 넓혀 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버스가 번호판을 단지 열흘 만에 큰 사고를 내고 말았으니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1979년 7월 1일 주일. 오전 10시쯤 되었을까, 본당에서는 주일학교 예배가 진행 중이고 나는 곧 이어 11시부터 시작될 대예배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 시간 중,고등 학생 20 여명을 싣고 오던 교회버스가 건널목에서 기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정신없이 현장에 달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교회 버스가 철길이 있는 언덕 아래쪽 논구덩이로 물구나무서듯 거꾸로 쳐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버스 주위론 여기저기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단층건물인 교회당에는 예배실 하나만 있고 교육관이 없었기 때문에 중, 고등부 학생들은 50석이나 되는 버스 안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는데 그 첫날에 이런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사고 현장에서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된 딸 애가 머리를 땅에 처박고 죽은 듯이 논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아차! 내 딸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스쳐 갈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안타까운 순간에도 당장 버스의 앞바퀴 밑에 깔려서 신음하는 남자를 보고 거기 달라붙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살려보겠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경찰차와 구급차가 달려와 환자들을 후송해 갔는데 중상을 입은 그 남자는 병원에 도착 하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그날 주일도 잊은 채 병원의 응급실을 돌아다니며 아파서 소리 지르는 학생들을 살펴보았고, 사망자의 유족들이 절규하는 아픔을 보며 망연자실하기도 하였다. 28년의 세월이 흘러 그때의 10대들은 이미 40대 중반이 되었고,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잃은 어린것들도 지금쯤 30대의 장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일 이후로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악몽 같은 그때 일이 생생하게 되살 난다. 그리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또한 그때 나와 고통을 함께 했던 고마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축원하곤 한다. 특히 이름도 모르는 피해자의 젊은 부인과 어린 아들 딸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생각하면서 무거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다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을 쓸어 안아주시고 크게 보상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다.

출처 : http://www.hu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