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예람지기 2006.12.17 12: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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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의 추억(06. 12. 17)

 

나이가 들어 갈수록 어릴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향수 를 불러 일으키곤 한다. 12월이 되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 올 때는 추억 속에 사라져간 성탄절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동심에 빠져 드는 것을 종종 느끼게 된다.

반세기전 우리나라의 사정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때의 문화나 환경을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말을 하면 전설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6. 25가 일어났는데 전쟁의 후유증은 오래도록 힘든 나날을 보내게 했다. 그 시절에는 전국 어디에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그중에도 내가 살았던 거제도에는 가난뿐만 아니고 사람들의 의식이나 문화가 폐쇄된 옛날 모습 그대로를 답습하고 살았다. 그런 산간벽지에까지 복음이 들어오고 교회가 세워진 것을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 시절 교회가 있는 마을에서는 성탄절이 되면 교회에 한번이라도 안 가본 아이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교회마다 여름 성경학교를 비롯하여 다양한 행사와 축제들이 있어서 수시로 초청을 받곤 하겠지만 그때는 오직 성탄절이 최대의 행사이고 유일한 축제였다.

6. 25동란 이후 우리나라에는 상당기간 외국으로부터 원조가 들어왔는데 특히 교회는 미국 선교부에서 보내주는 구제품을 받아서 나누어 주곤 하였다. 옥수수 가루와 분유, 처음 먹어보는 초콜렛 과자, 또는 여러 종류의 옷가지들까지 구제품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서양 사람들이 입던 원피스나 브라우스 같은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형에 맞지 않았지만 그런 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오죽 했으면 <기쁘다 구주오셨네>찬송가의 곡을 따서 “기쁘다 구제품 나왔다/ 다함께 모여라 /목사는 오바(외투)/ 조사(전도사)는 잠바/ 다가져 가거라…”이런 식으로 짓궂은 노래가 나돌기도 했으니까.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다가 강단 양쪽에 세워놓고 흰 솜과 색종이 고리를 걸쳐 장식을 한다. 예배당 천장에는 만국기를 펼쳐놓고 강단 뒤쪽에 색종이를 오려서 “축 성탄”이라고 붙이는가 하면, 내부 벽에는 은박지로 만든 별과 약대를 타고 가는 동방박사의 그림을 만들어 붙이는 등 밤을 새워가며 솜씨껏 작품을 만들어 낸다. 축하 행사에는 어린이들의 합창, 중창, 독창과 함께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성극발표까지…. 레퍼토리는 주로 외양간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옆에 서 있는 요셉, 그리고 예물을 들고 찾아와서 절을 하는 세 사람의 동방박사 정도이지만 거기에 심혈을 쏟는 열정은 어디 내어놔도 손색이 없다.

성탄절 예배가 끝나면 주일학교에서는 각종 시상을 하는데 가장 큰 것은 출석상 그 다음은 인도상, 요절상, 연보상을 비롯하여 우수반과 개인에게 공책, 연필, 지우개 등 학용품들을 상품으로 나눠준다. 이런 것들도 그 시절에는 교회 가는 재미고 자랑이었다.

성탄절 하면 무엇보다도 새벽송이 인상 깊은 추억으로 떠오른다. 크리스마스이브를 교회에서 지내다가 새벽닭이 울기 전 교인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게 된다. 시골에는 몇 집 안 되는 가정들이지만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어서 개울을 건너 들길을 가거나 산고개를 넘어서 가는 경우도 있다. 방문하는 가정에서는 기다리고 있다가 대원들이 마당에 들어서면 같이 나와서 찬송을 하고 방안에 들어가서 따뜻한 식혜(감주)나 떡국을 끓여 먹인다. 집집마다 거저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인절미 또는 엿이나 한과, 곶감 같은 것을 준비했다가 내어주는 등 소박하고 정감 넘치는 훈훈한 우리네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급변하는 시대의 환경에 따라 신앙의 정서도 엄청나게 달라져 있어서 크리스마스의 풍속 또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2000년 전 목자들의 귓가에 울리던 천사들의 찬송소리 같이 아기 예수 나신 그 기쁜 소식을 마음에서부터 느끼며 이웃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따뜻한 새벽송이 그리워진다.

출처 : http://www.hu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