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수많은 사람들과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만남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변화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딸로 인해 고통스럽게 지내던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기의 딸이 고침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나와 그것의 만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예수님을 자기 딸의 병을 고치는 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이러한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제자들을 붙잡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냉정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자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 중심이 바로 되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과 그녀 사이에 ‘나와 너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만남의 관계가 이루어지자 예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와 그것’의 만남은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필요치 않은 때는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돌아서는 일시적이요 이기적인 만남이지만, ‘나와 너’의 만남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와 너’가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곳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만남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 그분의 만남’의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