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예람지기 2010.07.11 10: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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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될 한계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질서를 위한 안전장치가 있다. 공항의 출입국 심사장에는 앞사람의 수속이 진행되는 동안 대기자들이 바닥에 그어 놓은 줄 밖에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게 되어있다. 지하철 승강장에도 대기선의 표시를 따라 질서 있게 줄을 서야 된다. 바닥에 그어진 줄은 누구나 다 지켜야 되는 한계선을 뜻한다. 그 경계가 무너지면 혼란이 야기되고 결과적으로 자신과 여러 사람에게 불행을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켜야 될 한계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개인의 소양과 공동체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몇 년 전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을 때, 군중심리를 자극하는 집단의 힘이 무법천지를 만들고 공동체의 기능을 마비시킨 결과를 보았다.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아무리 많은 군중이 움직이더라도 지켜야 될 선(Police line)을 넘어서는 경우는 드물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나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어떤 일이든지 도(度)가 지나치면 화를 불러오게 된다. 친절도 과잉이 되면 결례를 범하게 되고 사랑도 지나치면 무례가 된다는 것 정도는 일반적인 상식일 것이다. 신앙 공동체에도 그 원리는 다를 바 없다. 아무리 신비의 체험이 있고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 있다 하여도 절제되지 않은 신앙행위는 엄청난 위험을 초래하고 만다. 지식과 인격의 뒷받침이 안 되는 믿음이 어디에서나 균형을 잃은 일방통행으로 빠지게 한다. 사람이 지켜야 될 금도를 벗어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새 하나님의 영역에 까지 침범해버리고 만다. 성숙된 신앙의 자세는 자기의 한계를 알고 분수를 지키는 것이다. 못이기는 척 한걸음 물러서 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옛날 어른들은 '쥐를 잡으려다 독을 깨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쉴 새 없이 드나들며 곡식을 축내는 쥐를 잡으려고 돌을 집어 들었으나 막상 던지려는 순간 뒤에 있는 항아리를 생각하게 된다. 돌을 정확하게 던져서 쥐를 잡았다 하더라도 그 돌이 튀는 바람에 항아리가 다칠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차라리 쥐의 소행이 못마땅하더라도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보다야 낫다는 심정으로 자기를 다잡는 자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치에 맞는 말이라도 가려서 하고 정의감이 발동하는 행동이라도 다음 일을 생각하며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첩경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