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6.02.05 00:00:00
1089
  • 일자
    2006-02-05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마태복음 17:1~18
 

현대인들은 문명의 이기 속에서 한없이 편리함을 만끽하면서도 즐거움과 행복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오히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연된 피곤 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간혹 공기 좋고 자연환경이 좋은 곳에 가면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온갖 공해에 시달리다 보니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을 마시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건강한 몸과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환경이 좋은 곳에다 돈을 많이 들여 전원주택을 지어놓고 건강관리를 하면서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돈이 많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이 외부적인 환경을 꾸미고 육신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마음에 평안함과 여유를 갖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자기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9에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있는 영혼의 욕구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와 같은 세상 것으로 채워질 성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전 3:11).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는 재벌의 총수도, 권력의 실세도, 인기절정의 스타도, 여기가 싫어서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기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적인 조건이 충족된다고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행복해 할 수는 없다는 반증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사도 베드로는 변화산의 체험을 하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감격스럽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면 그곳에다 집을 짓고 영구히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산의 현상은 우리가 소망하는 천당의 모습이며, 모든 사람이 행복해 할 수 있는 본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와 같은 천당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항상 최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상향이 있습니다.



 I.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21:2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사이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1-13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설명한 것입니다. 거기 보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는 깨어있어서 등불과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려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부부의 관계를 행복하게 하는 요체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일 경우 언제나 어디서나 같이 있으므로 즐겁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 가시면서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28:20).


(1) 방해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구약 성경 중 솔로몬이 기록한 아가서는 사랑스러운 부부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의 주인공인 솔로몬과 술람미는 예수님과 성도들을 나타내는 상징적 계시입니다. 그들은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 봉한 샘”으로 표현되는 비원(秘苑)에서 두 사람만이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행복을 누리고자 희망하였습니다(아 4:12).
그렇지만 거기에는 예기치 못한 시험이 들이닥치며 두 사람만의 행복을 방해하곤 하는 것입니다. 아가 2:7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2:15에는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성도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이 최상의 행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희망과 달리 외부적인 시험이나 환난이 주님과 평온한 밀월관계를 방해하고 있어서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천당에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참 사랑과 행복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21:3에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신다”고 하였습니다.

(2) 완성된 세계입니다.

계시록 21:1에는 그곳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기존에 있던 하늘과 땅과 바다는 다 소멸되어 버리고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세상은 죄로 오염되었거나 전쟁, 재난, 질고 등으로 파괴되고 얼룩져 있는 곳입니다. 또한 마귀가 활동하는 곳이어서 온갖 부정과 부패와 부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리 죄악을 척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애를 써도 인간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완전하게 바꾸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21:5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하고 선언하였습니다. 세상에서와 달리 그곳에서는 한 가지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마귀의 활동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죄와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자기의 원하는 일이나 희망하는 것을 만족하게 이룰 수가 없지만 거기에서는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지고 모든 것에서 만족하게 되는 최상의 기쁨이 보장된 곳입니다. 이처럼 완성된 천국의 현장이기에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마냥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자고 제의하였습니다.


 Ⅱ. 환상의 세계입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도미시안(Domitianus)의 박해로 밧모섬에 유배 갔던 사도 요한은 주일날 아침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신비로운 광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황홀해 하였습니다(계 1:9-16).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간 세 제자들은 한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상의 세계로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과히 천당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게 합니다.


(1) 변화된 사람이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눈이 열린 사람이라야 볼 수 있는 세계입니다. 예수께서 벳새다에서 소경하나를 만났습니다.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소경의 대답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고 하였습니다(막 8:22-24). 눈이 열린 사람에게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17에는 “마음 눈”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신령한 눈과 귀를 가지고 신비로운 세계의 현상을 실제로 보고 듣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극심한 환난 중에 탄식하면서도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욥 19:26). 이 말씀은 죽은 다음에 영혼이 육체 밖에서 하나님과 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몸을 입은 자라 하더라도 이것이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면 신비로운 하늘나라의 현상을 현실 세계에서와 같이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합니다(요 3:3).

(2) 우주적인 대화합을 맛보게 됩니다.

계시록 7:9-10에는 “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언어나 종족이나 국가에 구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을 추월하여 모든 인종이 다 함께 교제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만약 세상에서 이런 현상이 이루어졌다면 거기는 지역이나 계층, 또는 세대 간의 갈등이 증폭될 것이며 사상과 이념이 대립되고 각자의 자기 개성과 주의 주장이 맞부딪쳐서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수천 년에 걸쳐 세상나라들이 수없이 시도하였으나 모두 다 실패로 끝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천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공유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으로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3절에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과 선지자와 예수 곧 복음이 공존하고 구약과 신약이 화합하는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진 장면을 보게 됩니다.

(3) 신령한 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은 변화산 위에서 신비적인 체험을 하였습니다. 곧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또 모세와 엘리야처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인물들이 육체로 현현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덮고 있는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곧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5절).
이와 같은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순간 그들 스스로도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13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육신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일을 영적인 감각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순절 날 다락방에 모인 무리들이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자 그 눈으로 불의 혀와 같은 형상을 볼 수 있었고,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행 2:2-3).
따라서 성도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혈과 육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완전케 되어 있어서 환상이나 음성 같은 이적적인 사실들이 거기서는 일상적인 생활로 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Ⅲ. 이상과 현실의 관계


시편 84:1-6에 보면 하나님의 궁정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참새의 집과 제비의 보금자리”로 묘사하였습니다. 참된 사랑과 평화와 소망이 넘치는 삶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상과는 달리 저들이 생활하는 삶의 현장은 불안과 긴장의 연속인 “눈물 골짜기”로 표현되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궁정에서 가지는 기쁨의 감격으로 축적된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사막 같은 세상을 기쁨의 샘이 솟고 이른 비가 은택을 입히는 윤택한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성도가 변화산의 체험으로 천당의 맛을 실감하게 되면 눈물골짜기 같이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기쁨과 감사로 풍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후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의 상을 받는다고 노래하였습니다(시 23:4-5).

(1) 사역의 현장으로


베드로는 황홀한 변화산의 감격을 가지고 그냥 거기에 주저앉아서 살자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고 저희가 수종 들면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때 그 감격에 도취된 나머지 집에 있는 식구들이나 산 아래 머물고 있는 다른 제자들은 잊어버렸고 또 자기가 해야 될 책임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변화산의 체험은 산 아래서 그들이 수행하여야 될 사역의 연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소망의 확신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한 평생 중동천지를 유랑하는 나그네로 살았지만 하늘나라 영원한 집의 소망을 확신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15-16에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으나 그의 평생은 말할 수 없는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하늘의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소망이 있었기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지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출애굽 이후 사십 년에 걸친 광야 여행길이 순탄하지 않았으나 가나안 복지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믿었기에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가나안 시대의 새 역사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곧 이어서 부딪치게 될 십자가 고난의 두려움이  있었으나 변화산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소망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3) 선한 일에 열심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크게 당황해 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더우기 죽음 다음의 문제가 불확실하거나 지옥 형벌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삶에 대한 회의와 공포에 짓눌려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경우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자유를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안과 공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승리의 확신으로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변화산과 같은 천당의 체험을 가진 사람은 그 감격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57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승리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요동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한 일에 열심하며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헌신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였습니다.